감정이 다른 시계를 따를 때
※ 이 글은 오랜 기간 해외에서 생활해 온 한 한국인이, 시간과 거리의 간극을 두고 바라본 한국 사회에 대한 개인적 관찰을 바탕으로 한 기록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역·세대·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여기 담긴 시선이 모든 한국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 빠르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각
한국 사회를 처음 경험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는 대개 하나다.
“빠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속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시간,
회의가 결론으로 흘러가는 리듬까지.
모든 것이 빨라 보이고, 조금 성급해 보일때도 있다.
그런데 조금 더 머물다 보면,
이 빠름이 단순한 조급함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곳의 속도는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감정을 바로 꺼내지 않는 편이다.
속도가 감정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흐름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장면이 반복된다.
문화 충격은 대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 “일단 이렇게 가죠”라는 말의 온도
회의가 끝났는데,
왠지 충분히 말하지 못한 느낌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결론은 빠르게 정리된다.
“일단 이렇게 가죠.”
이 문장은 무성의한 타협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조금 다른 뜻을 품고 있다.
지금의 결정이 완벽하지 않다는 인정,
그리고 이 자리에서 더 밀어붙이지 않겠다는 선택.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편함도 분명히 있다.
다만 그 모든 감정을 이 순간에 꺼내는 것이
흐름을 깨고, 관계에 오래 남을 흠집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될 때
많은 사람들은 말을 접는다.
차가워서가 아니다.
감정을 아껴 두기 위해서다.
■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나중에 온다
외부에서 보면,
아무 문제 없이 합의된 것처럼 보였던 일이
시간이 지나 다른 목소리로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당황한다.
“아무 말도 안 했잖아.”
하지만 그 침묵은 부재가 아니었다.
감정이 처리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최대한 매끈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비공식적인 공간에서야
그때의 감정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다른 시간표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 바뀌고 있는 풍경들
물론 이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와 새로운 조직 문화 속에서는
감정을 뒤로 미루는 태도가
불투명함이나 회피로 읽히기도 한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말하고,
그 자리에서 정리하기를 선호한다.
속도보다 투명함을,
완곡함보다 즉각성을 택한다.
지금의 혼란은
어쩌면 두 시간표가 겹쳐 작동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마찰일지도 모른다.
■ 속도는 목적이 아니라 기술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관찰되는 속도는
단순한 효율의 상징이라기보다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기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을 줄이고,
설명을 생략하고,
빠르게 정리함으로써
서로에게 남을 감정의 흔적을 최소화하려는 선택.
이 방식이 언제나 편안한 것은 아니다.
맥락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일 수 있다.
다만 이 빠름의 뒤편에
의외로 많은 감정이 조용히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한국 사회의 움직임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속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