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무례와 친절 사이: 한국의 대도시에서 종종 차갑게 보이는 일상의 장면들에 대하여

말의 윤활유와 침묵의 기하학

두 도시를 흐르는 공기에 관하여

※ 이 글은 오랜 기간 해외에서 생활해 온 한 한국인이, 시간과 거리의 간극을 두고 바라본 한국 사회에 대한 개인적 관찰을 바탕으로 한 기록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역·세대·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여기 담긴 시선이 모든 한국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음 없는 밀도, 침묵의 기하학

서울이나 부산 같은 한국의 대도시 중심가에 서면 가장 먼저 압도적인 밀도와 마주한다. 수많은 사람이 쉼 없이 움직이고 길은 늘 붐빈다. 그런데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보면 의외의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토록 빽빽한 몸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대사만 빠진 채 배경소리와 장면들만 정교하게 이어지는 무성 영화 속을 걷는 기분이다.

이른 아침의 엘리베이터는 그 적막의 밀도가 정점에 달하는 공간이다. 문이 열리면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빈틈없이 들어서고, 몸과 몸 사이의 간격은 한 뼘조차 남지 않는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한 사람이 급하게 몸을 밀어 넣는 순간에도 공기는 고요하다.

다른 문화권이라면 “Sorry”나 “Excuse me” 같은 말이 공백을 채웠을 상황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말 대신 손이 먼저 움직인다. 닫힘 버튼이 눌리고, 짧은 기계음이 울릴 뿐이다.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은 그 긴박한 장면을 굳이 말로 받아내지 않는다. 누군가는 바닥을,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누군가는 허공을 응시한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고 대화는 생략된다. 엘리베이터는 위로 움직이고, 장면은 어떤 해설도 없이 종료된다.

이러한 ‘침묵의 효율’은 식당에서도 이어진다. 자리에 앉자마자 직원이 다가오고 주문은 짧게 매듭지어진다.

“이거 하나요.”

그 말에 굳이 감정이 실릴 필요는 없다. 과장된 미소나 긴 인사도 드물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주문은 정확히 전달되고 음식은 늦지 않게 식탁에 오른다. 계산은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다. 날씨를 묻거나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된다. 덕분에 공간의 속도는 빨라지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적이 주는 특유의 무게감이 공기 중에 쌓여간다.

말의 윤활유, 마찰을 줄이는 호흡

반면 런던의 아침 지하철 플랫폼은 조금 다른 리듬으로 움직인다. 통로는 좁고 사람들은 여전히 서두르지만, 몸이 스칠 만큼 가까워지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소리가 먼저 튀어나온다.

“Sorry.”

그 소리는 크지도 길지도 않다. 그러면 상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한다.

“Yeah, no worries.”

짧은 미소가 그 사이를 스친다. 이 미소는 상황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뻔한 순간의 긴장을 부드럽게 흩뜨린다. 장면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간다.

카페에서도 이 ‘말의 윤활유’는 부지런히 작동한다. 메뉴판 앞에서 잠시 망설이고 있으면 직원이 먼저 툭 말을 건넨다.

“Take your time.”

이 말이 주문의 속도를 물리적으로 늦추거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적이 어색함으로 번지기 전에 공기를 한 번 흔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Busy today, huh?” “Yes, always.”

특별한 정보를 담고 있지 않은 이 대화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주 잠깐의 여유, 즉 ‘완충 지대’를 만들어낸다. 덕분에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도 불편한 긴장이 곧바로 쌓이지 않는다.

엇갈린 신호와 숨겨진 주석

어느 날,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마주친 장면은 이 두 세계의 차이를 유난히 또렷하게 드러냈다. 외국인 여행자 한 명이 서툰 한국어로 주문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직원이 다가오자 환한 미소와 함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고, 추천할 만한 음식을 물으려 애를 썼다.

직원의 반응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받는 듯 마는 듯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메뉴판을 가리켰다. 대화의 윤활유를 잔뜩 준비해 온 여행자의 눈에는 그 태도가 냉정하게 보였을 것이다. 여행자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스쳤고, 식당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한 무게로 가득 찼다.

하지만 반전은 그다음이었다. 여행자가 음식을 먹다 젓가락을 떨어뜨리자, 직원은 그가 채 부르기도 전에 새 젓가락을 들고 나타났다. 여전히 입은 다물고 표정은 무심했지만, 손놀림만은 누구보다 빨랐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여행자의 등에 대고 직원은 아주 짧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했다. 투박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식사가 입에 맞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했다.

한국의 공공장소에서 말은 관계를 맺는 도구라기보다 과업을 완수하는 도구로 쓰일 때가 많다. 친절의 형태가 언어가 아니라 행위로 치환되어 있는 셈이다. 말의 윤활유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침묵이 곧 무관심을 뜻하지만, 한국의 침묵 뒤에는 종종 ‘보이지 않는 주석’이 달려 있다. 겉으로는 무심해 보여도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피는 ‘눈치’라는 이름의 주석이다.

무례함이 아닌, 공기를 다루는 다른 방식

다른 문화권에서 온 관찰자에게 한국의 이런 풍경은 낯설거나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말이 윤활유처럼 작동하는 문화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생략된 대사들이 남긴 공백 앞에서 멈칫하게 된다.

하지만 이 침묵을 개인의 불친절로만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장면은 도심 곳곳에서 너무나 보편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표정은 있되 대사는 없고, 의미는 분명하되 설명은 생략된 한국 도심 특유의 ‘무성 영화적 문법’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무례함의 표현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사람들이 안면을 트고 관계를 맺는 순간, 그 침묵의 장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커피 한 잔을 먼저 건네고, 길을 묻는 낯선 이를 위해 몇 블록을 함께 걸어가며, 식사 자리에서는 온갖 음식을 권하는 뜨거운 친절이 그 안에 숨어 있다. 다만 이런 무언의 태도가 밖에서 온 이들에게 어떤 인상으로 읽힐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작 우리 스스로 무감한 편이다.

시선의 이동이 주는 선물

나는 어느 한쪽이 더 낫거나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이 쉼 없이 흐르는 장면도, 말이 비어 있는 장면도 각자의 질서 안에서 일상을 통과시키는 방식일 뿐이다. 다만 두 도시의 장면을 나란히 놓고 보면, 우리가 같은 찰나의 순간을 전혀 다른 감각과 속도로 건너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새는 바람을 의식하지 못하고, 물고기는 물을 느끼지 못한다. 사람 역시 자신이 숨 쉬는 사회적 공기의 결을 좀처럼 자각하지 못한다. 오직 다른 곳을 걸어본 뒤에야 비로소 자기가 서 있던 자리를 조용히 돌아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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