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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 중심 질서가 형성된 시간의 조건
※ 이 글은 오랜 기간 해외에서 생활해 온 한 한국인이, 시간과 거리의 간극을 두고 바라본 한국 사회에 대한 개인적 관찰을 바탕으로 한 기록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역·세대·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여기 담긴 시선이 모든 한국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입부
보통 한 사회에 대해 설명을 해야 되는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종종 떠올리게 되는 대표적인 장면들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를 떠올리면, 어떤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회사 회의실에서 다들 입을 꾹 닫고 눈치만 보는 어색한 침묵, 아니면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고 남아 있는 모습들, 말보다 먼저 분위기를 읽고 움직이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이런 모습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뿐만이 아니라 어렵지 않게 실생활에서 떠올리게 되는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우린 종종 이런 장면을 보며 “저 사람은 성격이 소심해서 그래”라며 개인의 성격으로 치부하거나, 우리나라는 이래서 문제야”라며 문화의 문제로 정리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잠깐만 시선을 뒤로 물려 보면, 이 장면들 뒤에는 다른 질문이 놓여 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행동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이런 행동이 오랜 시간 유지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사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특정한 말투와 태도, 관계를 다루는 방식은 수많은 반복 속에서 굳어진다. 그리고 그 반복은 대개, 사람들이 어떤 시간 속에서 살아왔는가와 깊이 맞닿아 있다.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이 시간의 감각은 중요하다.
이 글은 한국 사회와 서구 사회의 차이를 옳고 그름이나 우열의 문제로 나누지 않는다. 대신, 두 사회가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어떤 질서를 축적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여러 해석 중 하나의 관점일 뿐이며, 각 사회의 복잡성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둔다.
한국 사회가 맥락 중심으로 형성된 조건
한국 사회를 이해할 때 한반도의 독특한 역사적 흐름을 함께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 이후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위기와 단절이 있었음에도 언어와 문화의 기본 골격이 유지되어 왔다. 왕조는 여러 차례 바뀌었고, 외세의 침입과 전쟁, 근대의 식민 지배와 분단이라는 고통스러운 단절도 겪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되는 언어와 일상의 관습은 완전히 해체되기보다 변화하면서도 이어지는 방식에 가까웠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문화권 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회에서는 모든 기준을 매번 명시적인 말로 설명할 필요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대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고맥락(High-context)의 전제들이 천천히 쌓인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굳이 명문화하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사회적 문법이 형성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교육의 첫 번째 목적이 자기 생각과 자신을 언어로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Articulate)을 만드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 반면 유교적 전통에서는 각자의 처지와 상황을 헤아릴 줄 아는(時中) 인간을 기르는 데 더 가까웠다.결국 ‘내 생각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 중심이냐, ‘상황과 관계를 먼저 고려하는 사람’이 중심이냐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조건 속에서 상황을 먼저 살피는 태도는 자연스러운 생활 기술이 되었고, 맥락을 읽는 능력은 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감각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특정한 민족적 성향이라기보다, 긴 세월 반복된 공동체 생활이 만들어 낸 문화적 습관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늘 긍정적으로만 작동한 것은 아니다. 맥락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되기도 했고, 명확한 소통이 필요한 순간에 오히려 혼란을 만들기도 했다.
고맥락 사회는 예외가 아니라 여러 사회에서 나타난 형태
여기서 시선을 조금 더 넓혀 볼 필요가 있다. 맥락을 중시하는 고맥락 사회는 한국만의 특수한 사례라기보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난 사회 운영 방식 중 하나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의 이론에 따르면, 오랜 역사와 문화적 연속성을 지닌 지역일수록 사람들이 관계와 맥락을 중심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조건은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동의 일부 지역, 남아시아, 중남미의 오래된 공동체들에서도 유사한 맥락 중심의 작동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각 지역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은 매우 다르며, 이를 하나로 뭉뚱그려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에 비해 개인 중심·규칙 중심의 저맥락(Low-context) 사회는 이질적인 집단이 대규모로 섞여 살아가야 했던 환경,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계약과 법 중심의 질서를 표준화한 서구적 시스템 속에서 강하게 발달했다. 이 방식 역시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사회 운영 방식이다.
중국과 일본, 비슷하지만 다른 결
비슷한 맥락을 공유하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이 질서의 결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은 광대한 영토 안에서 수많은 민족과 세력이 교차해 왔다. 관계(관시)가 무엇보다 중요한 맥락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일찍부터 법과 제도라는 명시적 규칙을 고도로 발달시켜야 했다.
일본 역시 강한 맥락 중심 사회이지만, 한국과는 그 형성 과정이 다르다. 일본은 봉건제적 전통 속에서 각 지역 공동체의 독립성이 강했고, 그 안에서 ‘공기(쿠우키)’를 읽는 특유의 질서가 발전했다.
반면 한국은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를 일찍 완성하며 행정적으로 통합된 사회 구조를 형성했다. 그 결과 관계와 맥락을 고려하는 경향이 사회 여러 층위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역시 지역별, 계층별 차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서구 사회는 왜 다른 길을 택했는가
서구 사회는 다른 조건 속에서 발전해 왔다. 제국의 팽창과 몰락, 대규모 이주와 급격한 도시화는 서로 다른 언어와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질서 안에 묶어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공유된 전제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알아서 이해하라”는 방식이 작동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환경에서는 무엇보다도 명확성이 최우선이 된다. 그래서 서구 사회에서는 오해를 줄이기 위해 언어 표현의 명확성과 정밀함이 강조되었고, 각 개인이 자신의 의사와 능력을 명확히 표현하고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떠올랐다. 기준을 문서로 정리하고, 책임을 개인 단위로 나누며, 말의 의미를 가능한 한 명확히 하는 저맥락적 방식이 사회 질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는 계몽주의, 개인주의 철학, 프로테스탄티즘, 자본주의의 발달 등 복합적인 역사적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이는 더 우월한 선택이라기보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발달한 사회 시스템이다. 이 방식 역시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화가 심화되며 공동체적 유대가 약화되거나, 지나친 규칙 중심성이 유연성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왜 오늘날 서구 질서가 기준처럼 보이는가
오늘날 저맥락 사회의 질서가 보편적 기준처럼 인식되는 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근대 이후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현대적 법 체계 등 전 세계의 표준을 설계하고 확산시킨 주체가 서구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규칙 중심 질서는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것’으로, 맥락 중심 질서는 ‘전근대적이고 불분명한 것’으로 평가받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이는 질서 자체의 우열 때문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시스템이 저맥락 질서 위에서 설계되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맺음말
사회는 하나의 원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맥락 중심 질서는 관계가 깊고 오래 이어지는 환경에서 조용히 작동해 왔고, 규칙 중심 질서는 이질적인 사람들을 하나의 틀 안에서 조율하는 데 기능해 왔다.
현재의 한국 사회를 보면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국내 자체의 변화만 해도 각 세대별로 서로 다른 경험의 충돌을 일으킬 만큼 큰데, 더불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수많은 이민자들의 급작스러운 유입으로 인해 오랫동안 유지해 온 “알아서 이해하라”는 맥락 중심의 질서는 급격한 변화를 맞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느껴지는 혼란은 어느 한쪽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 몸에 익힌 ‘맥락의 질서’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의 질서’가 한 공간에서 충돌하며 적응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그 차이를 판단하기보다, 그 차이가 만들어진 시간의 궤적을 돌아보려는 기록이다. 하나의 관점일 뿐,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혀 둔다.
